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시 앤드 칩스 (문단 편집) === 역사 === 정확하게 누구에 의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알려지게 된 것인지는 불명이다. 생선을 기름에 튀겨 먹는다는 발상은 [[고대 로마]][*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였을 때 소년이 내놓았던 생선도 굽거나 훈제를 한 게 아니라 튀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지역에 생선 튀김이 꽤 유행했기 때문이다.]나 [[중국]]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영국에서 생겨났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일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지배 이래로 [[올리브]] 나무를 대량으로 재배해 비교적 식용유를 구하기 쉬워 튀긴 음식이 발달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지역에서는 카톨릭의 영향으로 [[사순절]] 등 일정 절기마다 고기를 금하고 튀긴 생선과 야채를 먹는 전통[* 이 기간을 포르투갈어로 텡푸라(têmpora)라고 부르는데, 이 야채 튀김이 [[일본]]으로 넘어가 이 절기 이름을 요리 이름으로 착각해 [[텐푸라]]가 되었다.]이 있었고, 이러한 식문화를 공유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16세기 종교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를 거쳐 잉글랜드로 이주하며 생선에 반죽을 묻혀 튀기는 조리법을 들여와 널리 퍼트린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리법'으로 알려진 이런 생선튀김은 선원들이 그랬듯 '''생선을 저장하기 위해''' 사용된 요리법이며 실제로 생선을 튀긴 후 식혀 와인이나 맥주로 만든 식초로 피클을 만들어 최대 1년까지 저장, 먹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말의 영국 요리책에서는 '다른 이들이 극혐하는 생선도 이 방법이면 맛있어진다'며 유대인들의 생선튀김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핵심 재료인 [[감자]]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에 들어온 데다가 이후로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당시 감자를 어떻게 먹는지는 정작 같이 안 들어와서 다른 식물들처럼 풀이나 줄기를 먹었다가 안 좋은 상황이 자꾸 발생해서 못 먹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이후 어딜 먹어야 하는지는 의사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한동안은 가축 사료나 전쟁 포로에게 던져주는 용도로 사용했었다. 결국은 [[프랑스]]의 파르망티에나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해내서 보급에 힘을 쓴 덕분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게 처절하게 수탈을 당해서 먹을 거라곤 감자밖에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했던 [[아일랜드]] 같은 우울한 방법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선튀김과 감자튀김을 같이 먹는 것은 근대 영국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근현대에서 유명해진 까닭은 이 요리가 [[산업 혁명]]과 함께 면직 공장의 부산물로 아주 싸게 대량으로 유통되게 된 [[면실유]]로 인해 튀김이 저렴해지고,[* 산업 혁명 이전까지 식용 기름은 아주 값비쌌다. 이 비싼 기름을 대량으로 써야 하는 튀김 요리를 먹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귀족이거나, 부자거나, 기름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정도였다. 대부분의 동물성 기름은 가축을 잡아야 얻을 수 있고 (물론 가축이 아닌 야생동물을 잡아 기름을 얻으려 한다면 그건 더 귀하다), 그나마 가축을 잡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유지방([[버터 등]])은 그 양이 적고 분리에 많은 힘이 들어가기 때문. 그렇다고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어지간한 작물에서 짜낼 수 있는 기름의 양은 그리 많지 않고, 많은 양의 기름을 얻기 위해 넓은 경작지를 사용하면 당연히 곡물등 다른 식량작물의 생산에 지장을 주게 된다. 게다가 작물에서 기름을 물리적으로 압착해서 짜내는 공정 역시 큰 힘이 들어가기에 이런 기름은 매우 비쌀수밖에 없다. (비교적 쉽게 대량의 기름을 얻을 수 있는 과수인 [[올리브]]가 괜히 고대 신화시대부터 귀하게 여겨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의 작물인 올리브는 다른 기후에서는 재배하기 힘들다.) 따라서 섬유([[면직물]])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어차피 대량으로 재배하는 [[면화]]에서 부산물로 면실유를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추출 역시 물리적 압착(힘과 무게를 가해 짜내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용매를 통해 쉽게 녹여낼 수 있게 된 이후에야 서민층이 쉽게 식용유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저인망]] 어업이 개발되어 생선의 대량 공급이 가능해져, 신선도가 떨어지는 싸구려 생선과 감자를 노상에서 빠르게 조리해 팔 수 있는 방법으로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빈곤으로 인해 집에 조리 도구가 변변찮은 수준밖에 없고, 도구가 있어도 조리할 시간조차 없는 데다, 음식 재료 또한 변변찮은 수준밖에 갖출 수 없어 집밥 자체가 변변찮은 수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가정 환경에서 생선살 튀김과 감자 튀김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맛없기도 힘든 조합이라[* 대량의 기름을 사용한 튀김(deep fry)은 가정에서 일가족이 먹을 음식을 소량 조리하기에는 비효율적인 조리방법이지만 대량 조리에서는 오히려 시간과 노력, 비용의 절약이 가능한 효율적인 조리법이다. 게다가 '튀기면 신발도 맛있게 먹을수 있다'는 말처럼 특히 힘들게 일하던 당시의 육체노동자들에게는 바삭한 식감과 큰 포만감을 주는 기름진 맛의 튀김이 더욱 맛있게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위생 면에서도 고온의 기름으로 튀기는 조리법은 식중독등의 위험성을 상당히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노동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산업화, 도시화 시대에 (식품위생법에 도전하는)(사실 식품위생법도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저질 식재들을 대충 튀겨서 팔아먹는 데 자주 쓰였다. 식혀서 식초에 재워 먹는 기존 방식과 달리 튀기자마자 뜨거울때 먹고 식초는 찍어먹는 식으로 '빠르게. 쉽게'먹는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보다 먼 바다까지 나가 생선을 잡아올수 있게 되면서 싼값으로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이 길거리 음식은 빠르게 영국 요리로 정착해갔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여파로 인해 [[1939년]] 후반부터 [[1954년]]까지 유지된 [[배급제]]로 [[전쟁/요리|피시 앤드 칩스는 더욱 대중화가 되었다]]. 당시 감자는 [[영국 정부]]의 배급제에서 자유로운 음식으로서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의 불만을 그나마 가라앉히는 용도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배급제로 인한 식료품 제한으로 식당이나 카페들이 문을 닫거나, 메뉴에 어쩔 수 없이 피시 앤드 칩스를 끼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 더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그만큼 묵은 생선이나 썩기 직전의 감자들이 튀겨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윈스턴 처칠]]이 피시 앤드 칩스를 평소 'The good companions(좋은 전우)'로 칭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이에 전투 중인 병사들 간 피아를 구분하는데 Fish? ... Chips! 를 암구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덤으로 상술 된 대로 생선 대신 [[미국]]에서 다량으로 들어온 [[스팸]]을 튀긴 스팸 프리터가 유행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